오늘 드디어 30년된 내 입술 밑 상처에게 작별을 고했다. 미루고 미루던 일 이번 한국 방문동안에 저질러 버렸다. 2012년 1월 12일. 안성열 성형 외과에서 흉터 제거 수술.
현재 친정에 머물고 있다. 아이들 맡길 사람이 필요했는데 엄마는 오늘 일이 있으시고 아빠는 혼자 아이를 둘 다 보시기 힘드시고, 시어머니는 수련회 참석중. 결국 시아버님 혼자 아이 둘을 다 봐주셨다. 선뜻 기꺼이 맡아 주신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머 전신마취 수술도 아니고 작은 흉터 제거 수술인데도 남편은 절대 나를 혼자 보낼 수 없다면서 오늘 하루종일 나의 기사가 되어 주었다. 사실 차로 가는 것보다 전철이 빠를텐데 굳이 기어코 나를 데려다 주고 데리고 왔다. 이런 남편도 드물 것이다.
아침 10시 친정을 출발해 아이 둘을 데리고 시댁에 갔다. 아이들이 자리잡고 잘 노는 것을 보고 점심 먹을 거리를 챙겨 놓은 후 남편와 12시쯤 시댁을 출발해 신사역 근처 성형외과로 갔다. 차로 가니 혹시나 막힐까봐 우선 목적지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남편의 선견지명인지, 아니면 중요한 일일 수록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꼼꼼함 때문인지, 차가 무지하게 막히더니 결국 무슨 사고가 났는지 성수대교 진입을 경찰이 막는다. 삥삥 돌아 신사동에 도착하니 1시 반경. 점심도 여유있게 순두부 먹고 우아하게 커피도 마셨다. 남편에게 박수 보내야 한다. 짝짝짝.
난 이런 일에 별로 겁이 없는 편인데 어제는 괜히 쪼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내 살을 도려내고 다시 봉합하는 수술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기다리고 있었단 생각이 들면서 살짝 두려워지기 시작했었다. 성형외과에서 수술 후 주의 사항을 들은 후, 옷 갈아 입고, 간단한 세안까지 하고, 내 상처의 before 사진도 찍고 수술 대에 누웠을 때, 그 상처를 가지고 살았던 지난 30년이 떠올랐다.
30년쯤 전, 1월 2일, 주일 날이었다. 신나게 기분좋게 새해 처음으로 교회 갔다 오는 길에 너무 기분이 좋았는지 약간 흥분한 채로 뛰어 오다가 콩크리트 길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그당시 흔하고 흔사던 자갈 섞인 울퉁불퉁 콩크리트 내리막길에서 넘어지면서 난 길에 박혀있던 돌맹이에 세게 내 턱을 부딪혀 아주 깊은 상처를 내었고 그 충격이 너무 큰 탓에 내 앞 윗니 두개까지 입안에서 입술 안쪽에 상처를 내어서 입 안팎으로 피를 엄청 나게 흘렸었다.
난 사실 어릴 적에 조심성이 별로 없어서 여기 저기 몸에 상처가 많은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심한 부상은 처음이었고 나 때문에 우리 어머니는 새해 정초부터 딸을 택시에 태워 이병원 저병원 뛰어 다니셔야 했다. 처음으로 찾아간 내가 자주 다니던 외과 병원(이름도 잊지 못하는 문영식외과)에서는 원장선생님이 일요일이라 안계시니 간단한 응급처치만 해주고선 날 내보냈다. 그 다음에 간 어떤 병원에서는 여자아이 얼굴이니 성형외과에 가야 한다며 또다시 나를 밀어냈다. 결국 간 곳은 고대병원 성형외과. (그당시 성형외과는 흔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젊은 아저씨가 중얼중얼 하면서 내 얼굴에 바늘을 대었다.
따갑고 아팠다. 하지만 난 아주 잘 참는 아이었다. 꾹꾹 참아가며 한바늘 한바늘 받아들였다. 내가 아프다는 소리는 내면 그 의사선생님은 '왜 아플까... 안아플텐데... 뭐가 아퍼...' 그런 말을 반복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안과 밖을 다 꼬메고 나서 내 입은 상상못할 정도로 부어 올랐고, 입 안에서는 실밥이 따끔따끔 나를 찔러댔다.
바깥에는 드레싱을 할 수 있었지만 입 안에는 드레싱을 못하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소독약을 입에 물었다 뱉기를 반복해야 했다. 아픈 상처도 싫고 따끔거리는 실밥도 싫고 소독약 맛도 싫었다. 게다가 밥도 잘 못먹었다. 넘어져 다치기 직전 급하게 뛰었던 그 순간이 너무나 후회됬었다. 그래서 빨리 빨리 낫기를 바랬지만 그때만 해도 낫기만 하면 될 줄 알았지 그 상처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으리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던 것 같다. 성형외과의 시술이었지만, 그 때 날 치료한 그 의사선생님은 인턴이었을까? 아니면 레지던트? 아뭏든 너무나 선명하고 촘촘한 수술자국이 내 입술 밑에 떡하니 남게 되었다.
하지만 희안한 건, 지난 30년 동안 난 별로 그 상처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더랬다. 나에게 그 상처에 대해 뭍는 사람도 꽤 있었고, 나 자신도 거울을 볼 때마다 신경이 쓰였을 법 한데, 난 자라면서 점점 그 상처의 존재를 잊으면서 살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 그 상처가 내 마음의 상처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정말이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테고 이 상처가 내게 준 영향은 "완전제로"였다. 이렇게 눈에 띄는 두드러진 상처가 나에게 전혀 컴플렉스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난 정말 감사드린다. 내 상처에 별 신경 안 써준 우리 부모님을. 날 볼 때마다 '아이고 이 상처를 어쩌니..' 하셨다면, 나도 그 상처가 계속 신경이 쓰였을 텐데,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해준 말 중 그 상처에 대한 말은 정말 몇마디 없었다. 대신에 내가 얼마나 예쁜지만 강조해 주셨던 것 같다. (우하하하 나보고 공주병이라고는 하지 말아주시길... 부모에게 자식은 이쁘기만 한 존재라는 걸 자식있는 사람은 알지 않겠는가...) 우리 언니들도 마찬가지. 툭하면 나보고 예쁘다고 해주었지 '언젠가는 없애야 할 상처'를 강조하진 않았던것 같다. 아뭏든 나의 자아상에서 그 상처는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겐 신경안쓰이는 이 상처가 남들에게는 꽤나 신경쓰이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우리 남편도 날 처음 봤을 때부터 약 2달 동안은 나 만날 때 이 상처만 보였다고 했다. 난 남들이 상처에 대해 물어봐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때로는 무용담처럼 그 상처에 얽힌 이야기를 늘어 놓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내 상처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들이 나한테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하셨다는 생각도 든다.
난 내가 이 상처 때문에 사람을 사귀는데 지장을 줄 것이란 생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 지장을 줄지도 모르겠단 의심도 한 적이 없다. 내가 결혼하는데 지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전혀 없다. 실제로 난 남자친구도 사귀어 보고, 결혼도 했다.
수술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난 과연 왜 이제와서 이걸 없애려 하나... 라는 질문을 다시 나에게 던졌다. 없으면 더 좋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과 이번엔 괜히 성형이 하고 싶어져서 한국에 온 김에 해 치우고 싶었던 건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진짜 대답은 "아이들을 위해서" 이다. (남편이 내게 수술을 권한 것도 이 이유니까..) 난 아이들을 기르면서 나 자신에 대한 것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내 성격, 내 어린시절, 내 배경등등... 그러면서 언젠가 내 아이들이 묻게될 내 상처에 대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나 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상처에 대해 물어볼 내 아이들의 친구들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던 거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나 자신에 대한 자신이 점점 없어지는 건가?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눈부신 수술대의 불빛 때문에 눈을 감으면서 '그냥 놔둘 걸 그랬나? 상처를 가지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햇지만, 이미 늦었고 상처가 없어지는 나 자신을 상상하며 난 이미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취 주사는 많이 아팠다. 아파하는 나를 원장님이 살짝 놀리셨다. 중간에 마취가 살짝 풀렸는지 몇번 따끔거렸지만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냥 턱이 얼얼하기만 했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하나도 안 아픈 건데 지금의 나는 작은 따끔거림도 참기 싫어하고 있었다. 오히려 30년 전의 어린 은성이가 더 의젓해 보인다.
수술은 지루했다. 얼얼한 턱. 얼굴을 간지럽히며 지나가는 수술 실. 무슨말인지 못알아 듣는 의사와 간호사간의 대화. 그리고 눈을 감아도 여전히 눈부신 수술대 불빛. 가끔 내 살이 땡겨지고 있다는 걸 느끼거나 살짝 따끔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지루한 시간에 할 수 있는 일 중엔 기도가 최고다. 수술대에서 엄마 아빠 시부모님 남편 아이들 언니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눈물 찔끔 나올 뻔 했다. 그리고 자연이 기도는 감사기도로 흘렀다. 날 무조건 적으로 사랑하시는 부모님. 내 인생의 큰 서포터 언니들. 내 상처를 보면서도 날 사랑해준 그리고 지금도 사랑해 주는 남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아들 딸. 너무나 좋으신 시부모님까지 난 너무 복이 많다. 특히 지금 밖 대기실에서 벌 아닌 벌을 서고 있는, 날 위해 내가 마다해도 같이 따라와준 남편이 너무 고맙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3,40분 쯤 걸렸을까? 아님 한시간 쯤 흘렀을까? 턱에 잔뜩 테이프를 붙이고 마스크까지 쓰고선 수술대에서 내려왔다. 별 피곤할 일도 없었는데 옷 갈아 입고 다시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에 나가는 내 몸이 천근 만근이었다. 남편이 내 곁에 있어준 것이 다시 너무 고마왔다.
밖에 나오니 눈발이 날린다. 지난번 눈이 왔을 때, 정말 오랜만에 눈을 보는데도 남편이 곁에 없고 내 손에 전화기도 없어서 남편에게 전화 할 수 있는 상황도 못 되는 것이 너무 아쉬웟는데 지금은 남편 부축을 받으면 눈을 맞고 있다니... 행복했다.
이젠 난 2주동안 말을 삼가야 한다. 수술 부위를 많이 움직이면 안되기 때문이다. 먹는 것도 티스푼으로 조금씩 떠 넣는 것이 전부이다. 그것도 흘리기 일쑤이고 잘 삼켜지지도 않는다. 아랫입술도 엄청 부어 있어서 가끔 침도 그냥 흘러 나온다. 그래도 30년 전보다 낫다. 우선 입 안에는 상처가 없고 따끔거리지도 않으며 음식 먹는 것도 훨씬 수월하다.
아이들과 의사소통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웃기기도 하다. 내가 손짓발짓하면서 '어어'로 모든 말을 하되 억양만 달리하는데, 하늘이가 그런 내 소리(말도 아닌)를 따라한다. 같이 '어어' 하니까 너무 웃기다. 평화는 곧잘 내 바디 랭기지를 이해하고 실행에 옮긴다. 기특한 것. 손으로 변기를 가리키며 '어어' 했더니 물을 내리고, 휴지들고 엉덩이를 살짝 쳤더니 닦아달라고 엉덩이를 내민다 또 손을 부비부비했더니 손씻으러 가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스크 안의 내 부은 입술을 보더니 너무 안쓰러워 한다. 수술 후 주의 사항 중에서 웃는 것이 가장 안 좋다던데 아이들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오려 해서 아이들과 접촉을 최대한 줄여야겠다.
날 웃기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남편. 내 손짓발짓을 잘 알아 들으면서도 장난으로 해석하면서 날 웃긴다. 내가 '자기 최고야' 의 의미로 두 엄지를 들어 보였더니, "머? 때리고 싶다고?" 하더니, 내가 '웃기면 죽어'의 의미로 주먹을 들어 보였더니 "사랑한다고?" 머 이런식으로 말한다. 아무래도 남편도 멀리해야 겠다.
집에 오자마자 날 안아주는 엄마. 엄마의 품은 언제나 좋다. 여전히 손주들 재롱에 즐거우신 아빠. 아빠의 웃음은 언제나 듣기 좋다. 이렇게 나의 꿈같은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 이제 2주일도 남지 않은 한국 생활. 그것도 벙어리로 살아야 하는 2주지만 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묻혀있는 즐거운 시간이리라.
아,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 포스팅은 지난 30년간 나랑 같이 있어줬던 그 상처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함이었지. 그 상처가 좀 서운해 했을까? 하는 생각을 살짝했다. 아무리 쥐죽은 듯 있던 상처지만 나의 일부분이었는데 떨어져 나가면서 날 원망했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 봤다. 어쨌던 간에 그 상처 덕분에 난 내가 얼마나 복받은 존재이며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 난 다시금 깨달았다. 고맙다는 말은 하면서 작별을 고해야겠군.
이 상처가 떨어져 나갈 때 나의 다른 부분도 같이 빠져 나갈 순 없을까? 라는 상상도 해 봤다. 예를 들어 내 상처가 내 게으름의 집약체였고 이제 나는 그 상처와 함께 게으름에도 작별을 고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상상. 게으름 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도.
오늘 수술이 나를 바꾸지는 못한다. 나는 나다. 상처 없던 30년 전에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지만, 사실 실제로는 별 의미 없지만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시간의 마디가 아주 큰 의미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오듯, 그러니까 예를 들어 새해의 첫날에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듯, 나도 내 상처에 작별을 고한 오늘 새로운 나를 꿈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활기차고 좀 더 용기있는 은성이를....
